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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곳: 광야를 지나며

권희연
HEE YEON KWON

2022. 12. 6 - 12. 17

현대인은 욕망의 그늘에서 높은 곳을 주시하며 범접할 수 없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욕망을 충족한다. 그러나 이는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성취하면 성취할수록 더 높은 욕망과 맞닥트리게 되 고 이는 결국 성취할 수 없다는 상실감과 패배감으로 귀착된다. 대 상을 소유한다고 해서 욕망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며 대상을 정복 한 후에도 욕망은 지속된다. 대상에 도달하기 위한 긴장상태는 현 대인의 결핍과 소외의 근원인 동시에 또 다른 대상을 찾아가고자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욕망의 불안정성은 대상을 변화시 키는 능력이자 이로 인해 욕망은 승화될 수 있다. 승화란 문화적 으로 고양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대상이나 가치 등에 도달하 려는 욕망의 방향전환 같은 것이다.


낮은 곳에 머문 시선

권희연에게 있어 그 방향전환의 실천적 양상은 작업의 주제들 을 일관되게‘ 낮은 곳의 삶’을 다루는 것이었다.‘ 낮은 곳’은 대 체로 고단한 삶이 이루어지는 기층민들의 터전으로부터 우거진 자연의 숲을 거쳐, 근작의 풀밭으로 이어지고 있다. 권희연은 낮은 곳, 혹은 인간의 욕망이 주시하지 않는 곳을 포착함으로써 ‘진정 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한편 우리가 잡초라며 홀대해왔 던 풀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그것은 하나의 인식론적 틀 혹 은 특정한 양식적 범주에 자신의 작업을 한정시키지 않고 대상을 자연의 근원까지 탐구하는 과학정신과 삶의 양태를 존재의 심연 으로부터 역추적하여 이를 실존영역으로 이끌어내는 인문정신이 결합된 결과물인 것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자연과의 유기적 연관성 속에 자리한 식물, 그리고 비 내린 후의 땅에서 움 트는 새풀 같은 생명력의 세계와 같이 풀들이 서로 공존하여 그들 의 세계가 결코 분리 되거나 차별화 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자연을 발견하고 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내면 감정의 장면을 연출 하여 존재의 순환적 의미를 상상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부 연한다.


권희연은 “그림은 단순히 자연을 보여주기 보다는 어떤 공간속 에 자리한 자연에 대한 상상을 자극하는데 가깝다. 풀은 개별자로 존재하기 보다는 항상 그것이 자리한 실존의 공간을 배경으로 해 서 표현되었다. 풀들이 서로 공존하는 그들의 세계가 결코 분리 되 거나 차별화 될 수 없음을 즉, 자연과의 유기적 연관성 속에 자리 한 식물, 자연의 세계임을 보여주길 원한다. 그리고 관자들이 풀이 있는 숲이나 산속을 자연스레 편안하게 상상해 보고 생성만이 아 니라 소멸에 대한 것 까지도 심리적 안정과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 으로 인식하길 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정체 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는 모더니즘 미술가와 같이 창조과정의 절대존재라기보다는 재료와 동등하게 호흡하며 공간을 구성하는 중세적 장인으로 비쳐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는 완전무결함의 가능성에 대한 암시적인 불신과 여전히 작가가 그의 작품에 기능 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숙명적인 입장이 교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처럼 권희연은 지표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되는 풀의 생 장작용이나 생명력을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이치와 섭리가 인간의 삶 속에서 올바르게 소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실험과 노동


장르적 구별이나 매재(媒材) 혹은 재료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입 장을 견지하는 작가는 현대회화가 이룩한 다양한 기법과 표현방식 을 운용하여 작품을 제작한다. 우선 작가는 캔버스에 황토와 혼합 재료를 반복적으로 입혀 표면에 깊은 마티에르를 부과하여 앵포르 멜 추상회화가 지닌 표현성을 극대화한다. 황토바탕 위에 석채, 분 채 등의 천연 안료가 겹쳐지며‘ 색을 베푼다’ 또는‘ 색을 입힌다’ 라고 불리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화면은 예기치 않은 생명성을 지 닌 색면회화로 거듭나게 된다. 이때 화면은 단순히 대상을 그리기 위한 바탕이라기보다는 이미 강한 회화성을 띠는 평면으로 존재하 게 된다. 작가는 여기에 그가‘ 낮은 곳’을 응시하고 포착한 풀이라 는 대상들을 표상하게 되는데 이는 그리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마치 들에 곡식을 심는 것과 같은 공력과 노동이 수반된다.


창조성의 원천은 노동이다. 페넬로페가 실로 옷감을 짜고 풀기를 반복했듯이 작가는 대상을 현대적 미감으로 변용하면서도 이의 본질적 형태는 유지하면서 대상을 축적해간다. 그럼에도 대상은 미묘한 군집을 이루며 조화와 균형, 파동과 멈춤, 이합과 집산, 형 상과 비형상의 리드미컬한 형태미를 보이며 관객과 조우한다. 화면 은 하나의 풍경화로서 공간구성이 절제된 투시법으로 처리되고 대 상들 역시 색채원근법이 적용되어 균제와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재현을 목적으로 한 구상회화라기보다는 작가 의 미적욕망이 완곡하게 제어된 추상회화에 더 가깝다. 추상성을 염두에 두고 화면의 기초를 다듬었을 뿐 아니라 대상을 염두에 두 었으면서도 이와 별개의 절대성을 추구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의도 가 이 점을 구축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자연의 외피보다는 그 본질의 탐색을 통하여 사 물의 정수를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재현의 형식으로 드러내 지 않고 기호 자체를 제시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작가는 재현된 작 품 보다는 행위의 흔적을 드러냄으로서 지속가능성을 보여주거나 재료의 속살을 날것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매재가 지닌 생명성에 호응하고자하는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공 간을 차지하고 있는 기호화된 풀들은 빛과 대기를 머금으며 스스 로 추동하면서 어떤 가치를 위해 쏟은 장인적 노고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풀들은 서로 어울려 군집을 이루다가도 형태나 색채, 빛과 어두움을 달리하며 어울림과 변별을 조장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 러한 형상을 통하여 풀이라는 외형을 구분하려기보다는 형태의 변주와 색채의 실험, 그리고 구상과 추상의 진화도식을 통하여 새 로운 조형성을 발견하고자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이 지점에서 작가로서의 진정성, 혹은 순수성의 측면이 부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는 어떤 기능적 목적을 위해 사물을 대상 화하기보다는 이를 생의 요소로 간주하여 육화시킴으로써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것은 인식주관에 대립하여 나타나는 현 상으로써의 사물이 아니라, 인식주관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써 존 재하며 현상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물자체(物自體)를 말하 는 것으로 칸트의 말을 빌자면 사유의 영역이기는 하나 인식 범주 인 완결된 실체는 아닐 것이다. 매체의 실험을 통하여 인식적 틀에 서 벗어나고 형식적 자유로움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고자 하는 권희연의 작품세계는 그래서 자연의 원초적 형상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현대미의 정수를 역설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글 이경모 미술평론가, 예술학박사



낮은곳- 광야를 지나며I, 캔버스에 분체.석채, 135x165, 2022


권희연 HEE YEON KWON


숙명여대 및 동대학원 석사

홍익대학교 동양화전공 박사

개인전12회 및 국제아트페어 18회

초대전 및 단체전 360여회

찾아가는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미술대전-회화 (서울시립미술관)

새천년 대한민국 희망 전 (국립현대미술관)

광주비엔날레 특별초대전 (광주시립미술관)

발해고왕 대조영표중영장제작 문화체육관광부 등재번호 86호

심사 

서울문화재단 공공미술프로젝트 심사

예술경영센터 다원문화예술공모 심사

한국미협 대한민국 미술대전심사 외 다수의 공모전 심사


현직

숙명여대 미술대학 회화과교수

한국화여성작가회 명예회장

한국화진흥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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